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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편지

부모님의 연애편지 1984년 2월 15일 Ep.25<He>

부모님의 연애편지 1984년 2월 15일 Ep.25<He>

 

색시

벌써 날씨는 봄을 몰고,

앞산 턱진 바위틈에서도

소리 없이 겨우내 쌓였던 눈들이

고운 봄빛의 입맞춤에 소리 없이 내리 녹고

희고 깨끗한 여린 나무줄기가 노란 꽃 망우리를 물고

마치 갓 태어난 제비 새끼처럼 새새우는것 같고

무던히도 춥던 올겨울을 너의 포근한 품속에서

아무 탈 없이 지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실바람 깨워일던 안개 젖은 메아리가

어둠을 흘려내린 깊은 골을 따라 나래치면

벌써 솜틀 젖은 흰 줄기가 파아란 하늘에

지새긴 옛날들을 생각하며 잠시 영상에 잠겨본다.

 

보내 준 편지와 사진 잘 받아 보았다.

집안에는 아무 별고 없다니, 마음 든든하구먼

겨울도 이제 서서히 물러가는가 보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 무척이나 바쁘단다

나뿐만이 아니겠지

경숙이도 물론....

 

얼어붙었던 땅이 녹아

연병장은 질푹질푹

온갖 만물들은 나른나른

봄의 맛을 물씬 느낄 수가 있구나

 

염려해 주는 덕분에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넘겼단다.

이제부터는 재미있는 군생활이 될 것 같구나

그렇게도 힘들었던 관문은 통과했으니까-

 

 

 

 

앞으로의 남은 일은 무엇보다도

숙이와의 사랑이 더욱 굳게 다져지는 것이겠지

 

숙!

우리들도 한 그루의 나무처럼 변함없이 살아 보자

나무는 그 평생을 한번도

자리를 옮겨 보지도 않고 살아간다.

그러나 봄이 오면 잎을 피우고

가을이면 그 잎을 떨어뜨리며 살아가지 않겠니?

그러니 우리도 보잘것없는 한 그루의 나무처럼

굳굳하게 서서 그 자리를 지키자구나.

 

숙!

벌써 1년이란 길고 긴 세월도 유수같이 흘러갔고

이젠 18개월. 아주 짤은 세월이지

"기다리자"

아마 3월말이나 4월초가 되어야만

만날 수가 있을 것 같구나.

 

숙아!

편지를 써 놓고 부치려고 하는 순간에

너의 편지를 받았단다.

그래서 다시 또 지금 너에게 편지를 쓴단다.

지금 이 시간 만큼은 무척 행복하다

모두들 잠들어 버린 아주 조용한 밤에

너와의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몰라

보내준 사진을 몇 번이고 바라보면서....

밤이 꽤 오래된 것 같구나.

졸음이 몰려오는 것을 보니-

 

 

그러나 펜을 놓기가 싫어 다시 또

한장을 더 채우기로 했다.

이번은 나도 욕심 좀 내보아야지-

 

뭐냐구?

답장이 오기 전까지는

펜을 들지 않을 것이다(글쎄)

 

참! 책 읽은 소감을 얘기해 보라고.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

종교란 순진한 꿈이요, 동정은 연약함이요

신은 인간이 고안한 이상이요

사람은 자연의 계교이다.

현대 여성과는 대조적이랄까

또한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랄까

한마디로 너무나 똑똑한 여성이다

그 유명한 니체를 만들었고

또한 릴케 등등...

아무튼"훌륭하다"

이성이 신앙을 파괴했을때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신비가는

신에서 평화를 찾기를 희망했을 것이고

이 희망이 삶에 의미와 빛깔을 주었을 것이다.

"재미있었다"

 

갈수록 글씨가 날아가는 구나. 이해.

이 밤이 새도록 낙서를 하고 싶지만은

내일을 위해서 오늘은 이만 여기서

 

안부 전하여라.

 

84.2.15